잊힌 교실 속 분필 냄새: 폐교에서 본 유년의 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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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필 가루 날리던 오후: 폐교에 들어선 순간의 감정

가을빛이 스며든 오래된 시골 마을, 언덕 위 작은 폐교에 들어서는 순간, 숨겨진 기억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먼지 낀 복도,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온 빛, 그리고 바닥에 남아 있는 분필 자국. 폐교는 단지 사람이 없는 학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릴 적 기억이 봉인된 공간이었다. 벽 한쪽에 아직 남아 있는 '우리 반 급훈'이라는 글씨, 교탁 아래 놓인 낡은 의자 하나가 어린 시절을 소환했다. 그날 따라 바람이 강했는지, 벽에 걸린 낡은 커튼이 펄럭이며 반쯤 열린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 순간, 초등학교 2학년 봄 소풍날 아침을 떠올렸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싸 들고 모여 있던 운동장의 흙냄새가 다시 떠오르는 듯했다. 폐교에 남아 있는 것은 책상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 숨 쉬었던 나의 과거였다.

 

2. 칠판 앞에 서면 떠오르는 얼굴들: 교실은 추억의 박물관

조심스럽게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떨어진 분필과 책 페이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칠판은 이미 글씨가 지워진 지 오래였지만, 그 위에 남겨진 자국은 분명 누군가의 이름이거나 '졸업을 축하합니다' 같은 문장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칠판에 장난치며 놀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하루 종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짝꿍, 반장이라며 유난히 책임감이 강했던 친구, 그리고 첫사랑이었던 그 아이. 낡은 교실은 마치 기억의 박물관처럼 그들을 꺼내 보여주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오후의 나도 있었다. 책상에 손톱으로 새긴 이니셜,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어 있던 독후감, 모두가 나의 유년을 물들였던 풍경이었다. 그리움은 구체적인 형태로 존재했고, 교실은 그 모든 기억의 저장소였다.

 

3. 운동장의 정적, 종소리의 부재가 남긴 여운

학교라면 떠오르는 가장 선명한 소리는 종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폐교에는 종소리가 없다. 대신 정적이 있다. 잡초가 자라난 운동장을 바라보며 서 있으면, 마치 그 정적이 과거의 소리를 빨아들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그 운동장을 바라보다, **“10분 뒤 체육 시간입니다”**라는 교내 방송 멘트가 귓가에서 맴도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고, 친구들이 뛰어가는 소리, 지면을 차고 오르던 고무줄놀이의 탄력, 모두가 과거 속 소리들이다. 소리 없는 운동장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전해준다. 그곳엔 누가 뛰던 자국도 없고, 지금은 뛰어놀 아이도 없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내가 살아 있었다. 이 운동장은 지금 폐허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스타디움보다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4.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다시 만난 나

폐교를 나서기 전, 나는 잠시 교무실 앞에 멈춰 섰다. 닫힌 문, 먼지가 쌓인 게시판,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깨진 시계. 바늘은 오후 3시 47분을 가리키고 멈춰 있었다. 그 시간은 아마도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때였을 것이다. 시간이 멈춘 폐교에서, 나는 멈춘 채 있던 나의 시간을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몸 속 어딘가에 품고 살아간다.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주 잊혀지지만, 어떤 공간은 그 기억을 선명하게 끄집어낸다. 폐교는 그래서 단순히 사진을 찍는 장소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뿌리를 되짚는 장소였다. 그날 나는 아무 사진도 찍지 않았다. 대신 그 풍경은 내 안에 깊게 새겨졌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나는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을 삼켰다. 그건 그리움이었고, 동시에 고마움이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그 시간과 공간에게 보내는, 조용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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