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낡은 주소, 이별을 앞둔 공간의 침묵
도심의 개발계획이 속속 발표되면서, 오래된 집 하나가 내일 아침 철거된다는 공고문이 붙었다.
주소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이는 없다.
이미 가족은 떠났고, 이웃은 흩어졌으며, 벽지의 꽃무늬는 빛바랜 채 바람을 맞는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집'이라기보단, 시간이 흘러간 껍질만 남은 공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밤, 이 폐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문턱의 삐걱거림,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먼지가 켜켜이 쌓인 찬장 위 그릇들.
이 모든 것이 마치 말 없는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철거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한 시절의 공식적 종료다.
그리고 이 밤은 그 종료 전, 잠깐 허락된 마지막 장면이다.
2. 남겨진 것들: 삶의 흔적이 말하는 기억의 언어
부엌 한편에는 낡은 국그릇과 가스레인지, 아직도 타다 남은 연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냉장고는 이미 오래전에 전원을 끊겼지만, 표면엔 여전히 아이의 그림 자석과 졸업사진이 붙어 있었다.
서랍 속에서 발견된 종이학, 바느질 도구, 노랗게 변색된 엽서 한 장.
이 모든 것은 어느 날의 일상이던 순간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공허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이 머물러 있었다.
특히 오래된 앨범을 펼쳤을 때, 나는 이 집이 어떤 가족의 역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폐가에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남겨진 것이 있다.
그것은 소유물이 아니라, 감정의 조각들이었다.
사진 속 웃고 있는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의 기억 속에도 이 공간이 남아 있을까.
나는 마치 기록자가 된 듯, 이 장소에 스며든 시간들을 하나씩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3. 벽에 새긴 이름과 밤의 소리: 폐허 속 살아있는 감각들
창문은 깨졌고, 바람은 자유롭게 출입한다.
벽에는 연필로 적은 ‘○○ 왔다감 1998.4.7’이라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누군가 장난처럼 새긴 글씨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 공간이 살아있었다는 증거이자 흔적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집은 더 조용해졌고, 그 조용함 속에서 모든 사운드가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 소리, 나무문이 바람에 밀려 삐걱이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
소리는 살아 있는 감각을 깨운다.
손전등 불빛 아래, 벽에 붙은 오래된 광고지와 일기장 조각들은
시간을 밀봉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공간은 기억의 외피일 뿐, 그 안엔 여전히 누군가의 삶이 머물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목격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4. 사라지는 집을 위해 남기는 기록: 폐허, 그리고 애도의 방식
새벽 3시, 나는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집 전체를 촬영했다.
빛바랜 이불과 반쯤 무너진 벽, 구멍 난 천장과 무심히 던져진 신문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이 풍경이, 나에겐 너무도 깊이 각인되었다.
내일이면 이곳은 사라질 것이다. 철거용 중장비가 들어오고, 흔적은 먼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폐가가 품고 있던 정적과 냄새, 온도, 감정까지
사진과 글로 남겨놓기로 했다.
기록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사라짐에 대한 예의이자 애도의 방식이다.
도시는 늘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작은 폐가 하나가
모든 유년과 추억이 담긴 세계였을 수 있다.
나는 이 집이 철거된 후에도 누군가는 이 글을 통해
그 밤을 상상해주기를 바란다.
이 기록은 한 집의 장례식이며, 동시에 시간에게 바치는 마지막 연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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