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곶자왈 깊은 곳, 길이 끊긴 자리에서 만난 폐가
곶자왈은 제주도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숲 같지만 숲이 아니고, 습지 같지만 사막처럼 마른 곳도 있다.
나는 지도에도 없는 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폐허가 된 집 하나를 만났다.
지붕 일부가 내려앉은 오래된 초가였고, 담장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처음엔 누구의 집이었을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돌의 배치나, 문 옆에 달린 종이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누군가의 생활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곶자왈 폐가 여행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예고 없이 다가온 폐허, 그러나 그곳은 공포보다 ‘감정’을 먼저 안겨주는 공간이었다.
제주도 감성 마을이라 불리는 동네들이 화려하게 변해갈 때,
곶자왈 안쪽에 남겨진 이 작은 공간은 시간마저 조용히 눌러두고 있었다.
🟩 2. 벽이 말해주는 이야기, 바람이 쓴 기억
나는 폐가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문은 이미 떨어져 있었고, 바닥엔 빗물이 스며든 자국이 남아 있었다.
벽지 대신 얇은 종이로 마감된 내부 벽에는 아직도 손때 묻은 흔적이 보였다.
그 위엔 누군가의 손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무언가를 쓰다 만 듯한 문장.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곁에서 나는 오래도록 움직일 수 없었다.
제주 폐허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이 흘러도 붕괴되지 않는 감정’이다.
기억은 무너져도 흔적은 남는다.
바람은 곶자왈 나무 사이를 돌아들어 집 안까지 들어왔고,
나는 그 바람이 쓴 기억 하나하나를 피부로 느끼며 하루를 준비했다.
감성 여행 기록이라는 말이 이토록 무거워진 건,
바로 그 벽에 남은 이름 모를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 3. 고요함이 무서워질 때, 자연은 나를 안아주었다
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곶자왈은 어둠이 짙었다.
달빛도 수풀 사이로 가로막혀 폐가 내부는 그림자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배낭에서 작은 랜턴을 꺼내고,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바람 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뛰었고, 벽 틈에서 들려오는 삐걱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곶자왈 하룻밤은 단순한 숙박 체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요함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무서움이 밀려올 때쯤, 곶자왈의 나무들이 나를 감쌌다.
바깥의 풀벌레 소리, 나무 위로 떨어지는 이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의 울음.
그 소리들이 점점 나를 진정시켰고, 나는 마침내 스르르 잠에 들 수 있었다.
제주 감성 숙박체험이란 이름으론 설명할 수 없는,
‘존재’를 느낀 밤이었다.
🟩 4. 잊힌 마을의 아침은 더 조용했다
새벽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의 결이 달라졌고,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는 기척이 폐가 안에 퍼졌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폐가의 문턱에 앉았다.
빛은 곶자왈의 나무를 뚫고 천천히 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울컥했다.
전날 내가 무서워했던 모든 것들이 이 아침엔 너무나 따뜻해 보였다.
곶자왈의 잎사귀들이 햇살에 흔들리고, 마당의 돌담 위엔 이슬이 맺혀 반짝였다.
제주 곶자왈 여행기는 이 아침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겐 잊힌 마을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감정을 채워준 가장 깊은 공간이었다.
폐허 감정기록이란 말은 아마도 이런 순간을 위해 생겨난 단어일 것이다.
나는 조용히 짐을 챙기고 폐가를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누군가가 “잘 다녀가라”고 인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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