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의 그림자 아래 머문 감정
루마니아 중부의 후네도아라(Hunedoara) 지역.
이 조용한 지방 도시에 다다르면,
마치 중세시대의 한 장면이 그대로 펼쳐지는 듯한
**코르빈 성(Castelul Corvinilor)**이 모습을 드러낸다.
짙은 회색 석벽과 날카로운 첨탑,
그리고 돌다리 아래 흐르는 깊은 계곡은
수백 년을 견뎌온 고딕 건축의 무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코르빈 성은 루마니아의 대표적인 고딕 양식 성으로,
15세기에 건축된 후 여러 차례 확장과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때는 요새, 궁전, 감옥의 기능을 모두 겸했으며
현재는 박물관과 문화유산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또는 시비우 지역에서 출발하면
버스나 차량을 통해 3~4시간 이내의 거리로 도달할 수 있다.
2. 복원되지 않은 폐허, 감정이 머무는 곳
성 내부를 들어서면,
첫인상과는 달리 완전히 복원되지 않은 공간들이 눈에 띈다.
부분적으로는 전시관과 회랑으로 꾸며졌지만,
많은 공간은 여전히 무너진 채 혹은 비어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균열이 그대로 남은 벽과
불완전하게 막힌 복도를 지나게 되는데,
그 순간 문득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특히 지하 감옥과 고문실이 있던 구역은
차가운 공기와 침묵으로 가득하다.
과거 이곳에 갇혔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안에서 오갔던 감정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느껴진다.
성의 각 공간은 ‘공간’이기보단
기억과 감정이 물리적으로 남은 흔적처럼 느껴졌다.
3. 건축은 감정을 기억하는 방식
코르빈 성을 걸을수록
나는 건축이 단지 눈으로 보는 구조물이 아니라,
감정을 저장하는 하나의 언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뚤어진 돌길, 울림이 남는 계단,
그리고 어두운 창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도
어떤 감정의 형상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흔히 아름답고 완전한 공간을 선호하지만,
이 성은 오히려 그 불완전함 때문에
더 진실하게 느껴졌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감정을 더 잘 담아낸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처음 실감했다.
4. 고딕의 잔향 속에 머문 나
성 위에 올라,
멀리 펼쳐진 후네도아라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내 안의 감정에도 천천히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감정을 누르고 살아왔던 나날들이
이 무너진 성벽을 따라
조용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폐허는 단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이 머무는 자리였다.
코르빈 성에서 내가 느낀 것은
중세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다시 보는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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