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의 끝에 숨겨진 마을
조지아의 코카서스 산맥 깊숙한 곳,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도착한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고산 마을 중 하나인 **우쉬굴리(Ushguli)**다.
이곳은 해발 2,200m에 위치해 있어
겨울이면 몇 달씩 외부와 단절된 채 고립되곤 한다.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2022년 조지아 편에서도
이 마을이 잠깐 소개되었다.
방송에서는 현지 주민들이 여전히 전통 방식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돌로 쌓은 탑들과 낮은 집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인상적으로 그려졌다.
그 방송을 본 후,
나는 그 마을이 내 감정 속 ‘고요함’과 닮아 있다는 걸 느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2. 멈춘 시간, 멈춰 있던 감정
우쉬굴리는 돌길 하나하나가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느낌이었다.
집 앞에 세워진 투르(Tower)는
과거 침략을 방어하던 탑으로,
지금은 그저 마을의 기억처럼 서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흘러가는 시간보다 멈춰 있는 감정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나온 수많은 관계,
풀지 못한 말,
정리되지 못한 기억들이
이 조용한 마을의 돌담처럼 내 안에 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소리내지 않지만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걸 마주하니
조용히 한숨이 흘러나왔다.
3. 방송이 지나간 자리에, 내 감정이 머물다
방송에서는
길게 늘어진 마을 풍경과 아이들이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 장면이
조용히 화면을 채웠다.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그 고요함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마을에 도착해보면
돌계단을 오를 때마다
신기하게 마음속 이야기들도 하나씩 꺼내지게 된다.
우쉬굴리의 공기에는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멈추고 들여다보게 하는 감정의 힘이 담겨 있다.
그 방송은 이제 기억 속에 스쳐가는 영상일 뿐이지만
나는 지금,
그 화면 속 풍경을 직접 걷고 있다.
그리고 내 감정은
그곳에 천천히 눌러앉는다.
4. 돌담보다 오래 남는 감정
이 마을에서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대단한 풍경도,
화려한 전경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조용한 하루가
수년간 마음속에 묻혀 있던 감정을 꺼내게 한 시간이었다.
돌담은 묵묵히 서 있었고,
바람은 천천히 골목을 스쳤다.
그 조용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오래된 말들을 하나씩 꺼낼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게 이 마을이 나에게 건넨 말 없는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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