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라진 신앙의 자리에서 시작된 감정
몽골 중부의 평원,
거센 바람과 흙먼지가 지나가는 벌판에
조용히 무너진 사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곳은 흡수굴 수도원(Karakorum ruins).
13세기 몽골제국의 중심지였던 카라코룸에 세워졌던 수도원으로,
지금은 일부 벽만 남아 사막과 함께 풍화되고 있다.
2023년 방영된 EBS 〈세계테마기행〉 ‘몽골의 기억’ 편에서는
낙타를 타고 이 유적지를 향해 이동하며
현지 가이드가 사라진 사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등장했다.
방송은 유적지의 쓸쓸함보다도
그 안에서 여전히 신앙과 감정이 살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도 그 방송을 보고
이 장소를 찾기로 결심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의 부서진 돌 사이에
내 감정을 하나씩 묻고 있다.
2. 무너진 공간이 감정을 끌어올릴 때
돌 벽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무 기둥은 이미 썩었고,
지붕은 바람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너진 구조물 앞에 서자
내 감정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아무도 없고, 아무 말도 없던 그 공간은
오히려 내 안의 말들로 가득 찼다.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감정,
무너뜨릴 용기조차 없던 생각들이
바람결을 따라 조용히 드러났다.
폐허는 상실의 공간이 아니라
감정이 자유로워지는 자리였다.
3. 방송보다 더 깊은 고요
방송에서는
낙타가 먼지 구름 속을 지나가며
사원의 기둥을 배경으로 멈춰 서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카메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 풍경을 조용히 담아냈다.
그 장면은 고요했지만
실제로 이곳에 서 보니
그보다 훨씬 깊은 정적이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을 듣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바람이 벽을 지나고,
내 숨소리가 돌에 부딪혔다.
그 순간,
나는 그저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 하나로
충분했다.
4. 바람은 모든 걸 가져가지만 감정은 남는다
수도원은 사라졌고,
사람들도 떠났지만
이곳에는 아직 누군가의 기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조용한 기도와 함께
내 감정을 바닥에 조용히 내려두었다.
폐허는 끝이 아니다.
무언가가 지나갔다는 증거이고,
남겨진 감정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를 바라보며
이 감정이 내 안에서 더 깊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길.
'폐허속 감성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 잊힌 암벽 위에 남겨진 신의 자리 (0) | 2025.07.21 |
---|---|
강화도 적석사 터, 사라진 절터 위에 쌓인 마음의 층 (0) | 2025.07.20 |
루마니아 코르빈 성, 고딕 그림자 아래 잠든 시간들 (0) | 2025.07.19 |
스페인 벨치테, 총탄 자국 속에 숨겨진 기억들 (0) | 2025.07.18 |
조지아 우쉬굴리, 고요함이 시간을 지키는 마을에서 (1) | 2025.07.17 |
볼리비아 기차무덤, 멈춘 철 위에서 나를 마주하다 (2) | 2025.07.16 |
풍경이 아니라 감정을 찍고 싶었다 (0) | 2025.07.16 |
그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나를 울렸다 (1) | 2025.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