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침묵이 필요한 날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이 필요 없는 날이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건 대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오는 날이다.
누군가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작은 소리 하나에도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
그럴 때는 말보다 공간이 필요한 날이다.
그 감정은 꼭 슬픔에서만 오지 않는다.
지침일 수도 있고, 과부하된 기분일 수도 있다.
혹은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어떤 불안이 마음을 가득 채웠을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어떤 장소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 많지 않고,
풍경보다는 공기의 결이 느껴지는 공간.
그곳에서는 누군가 나를 향해 말을 걸지 않고,
그저 함께 조용히 있어줄 뿐이다.
2. 말보다 공간이 나를 이해할 때
말은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말은 감정을 가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날이면 되도록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향한다.
그 공간은 대단한 풍경이거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이 좋다.
예를 들어,
도시 외곽의 작은 공원,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서관 구석 자리,
혹은 텅 빈 체육관의 벤치 같은 공간.
그런 곳에 앉아 있으면
누가 일부러 말을 걸어올 일도 없고,
내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 묻는 사람도 없다.
그저 그 공간의 침묵이 나와 같은 속도로 숨을 쉬어준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그 공간이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나를 품어주는 그 장소는
내가 가장 안전하게 감정을 풀 수 있는 은신처가 된다.
3. 사람보다 공간이 더 큰 위로가 될 때
어떤 사람은 위로를 위해 친구를 찾고,
어떤 사람은 음악을 틀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나는 그저 조용한 장소에 앉아 있기만 해도
감정이 조금씩 풀리는 사람이다.
그 공간은 마치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내 안의 소음을 흡수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공간에는 말이 없지만
묘하게 내 감정에 동조해주는 감각이 있다.
혼자 앉아 있는 벤치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
도서관의 창 너머로 보이는 흐린 하늘,
사람 없는 지하철 플랫폼의 전등 아래에서 머무는 정적.
이런 사소한 풍경들조차
그날따라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
사람이 줄 수 없는 위로가 공간을 통해 채워질 때,
나는 그 공간을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감정의 쉼터라고 부르게 된다.
4.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날, 내가 스스로를 찾는 법
말을 멀리하고 싶을 때,
나는 사실 ‘사람’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조용한 공간에 앉아 있으면
다른 사람의 시선도, 평가도 사라진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감정을 소리로 내지 않아도 괜찮고,
눈물을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공간이 모든 것을 조용히 수용해줄 때,
내 안의 불필요한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무게를 내려놓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날이 오면
더는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그 조용한 장소로 향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나를 회복하고,
조용히 하루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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